지리산길 자원활동가 교육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문화해설에 관한 이론 교육과 현장 교육이 있었습니다.
이론교육으로는 구례지역에서 문화해설사로 지내시는 김윤정 선생님께서 해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문화해설을 10년째 하시면서 겪었던 경험담과 문화해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건들에 대해서 얘기 해주셨습니다.
평범한 가정 주부였던 선생님께서는 30대 후반 가정 주부로써의 삶에 반기를 들고 심한 정체성에 휩싸이시다가 문화 해설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10년간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해설의 순간은 늘 설레 인다고 하셨습니다. 늘 설레이는 마음이어야 해설이 성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늘 자기발전을 위한 노력을 끝이지 않으셨습니다. 해설가의 중요한 자질 중에 하나로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준비된 사람만이 해설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하셨고 자신감을 강조하셨습니다.
교육을 들으면 내내 선생님의 말씀이 공감이 많이 갔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끊어오르는 열정의 힘을 느낄 수 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는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라는 말씀을 하시고 교육을 마치셨습니다.
수업을 들으면서 선생님과 내가 비슷한 사람인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선생님말씀에 많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눈빛이 너무 열정적입니다)
오후에는 남원 문화원 국장님이신 박찬용 선생님께서 남원 지역 중 운봉에 있는 문화제에 관련된 해설을 들었습니다.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격퇴시켰다 해서 기념으로 세워진 황산대첩비와 남원 동편제의 명창 송홍록선생님, 서천리 당산엘 다녀왔습니다.
남원은 지리산과 낙동강과 섬진강의 발원지가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산악문화권역의 지대를 보유하고 있어 천혜의 자연 환경적인 매력이 있는 고장이다. 따라서 지리산과 섬진강을 활용하여 지역문화와 문화유산을 만들어온 유서 깊은 지역문화가 잘 잘본해 있는 지역이다.
지금은 남원이 조용하지만 옛날에는 군사적, 교통적으로도 지역의 중심적 역할을 많이했다.
이성계와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데 황산대첩비와 피바위에서 살펴 볼 수 있다.
고려말에 왜구에 침략이 끊이질 않았다. 이 때 이성계장군이 왜군을 크게 물리쳐 그 공로를 인정해 황산에 비를 세웠다고 한다. 엄청난 전쟁이었는데 많은 군사들의 죽음으로 계곡이 다 핏물이되었을 정도이고 시체들이 쌓여 있던 바위에 피가 고여 지워지지 않았다 해서 피바위라는 이름이 불러지게 되었다고 한다. 황산대첩을 기반으로 굳건히 다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인월이라는 지명도 끌인에 달월로 전쟁당시 달이 떨오는 걸 이용했다고 해요. 그래서 하늘도 도왔다 해서 달오름, 인월이라는 마을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황산대첩비 바로 옆에는 판소리 명창 송홍록 선생님과 김초월 선생님의 생가가 있었다.
송홍록선생님은 동편제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소리꾼 중에 벼슬까지 얻은 사람이고 이 선생님 때문에 남원의 판소리의 명맥이 이어져 왔다고 한다. 아주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운봉에 박부자라는 아주 큰 부자가 있었는데 이 지역 대부분의 땅이 박부자의 소유였다. 비록 3대째가서 망하긴 했지만 그 후손이 남아서 골동품가게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박부자는 3월3일과 9월 9일에 농사에 시작과 끝을 알리는 축제를 벌렸는데 흥을 돋구어 주기 위해서 소리꾼을 모았다. 그 수가 많아져서 사립예술단을 소유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소리꾼들의 소리도 들어주고 대접해 주자 소리꾼들이 하나둘씩 운봉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소리꾼들이 기량을 키워나가기 위해, 농사는 안 짓고 노래만 하는 걸 좋게 봐줄리 없는 농민들을 위해 산속 깊이 폭포 밑에서 소리를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이곳이 소리의 본고장이 되었고 많은 명창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임권택 감독으로 인해 서편제가 유명해 졌지만 동편제가 가장 자연과 닮은 소리를 낸다고 한다. 소리가 이어져 흥선대원군의 명창 송홍록 명창이 그 명맥을 이어졌다고 한다.
다른 지방에서도 경쟁이 생겨 경기도에서는 경기민요가 생기게 되었다고 해요.
마지막으로 간곳은 서천리 당산이다. 보통 당산이라고 하면 나무를 생각하기 쉬운데, 이곳은 마을 입구에 돌장승이 세워져 있다. 마을에 수호신으로 안 좋은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좋은 기운이 나가는 걸 막아줬다고 한다. 또 이 곳에 음식을 올리고 제를 지내면서 마을에 안녕을 기원하고, 아이가 없는 사람들은 장승에 코를 문지르고 그 물을 먹으면서 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년전 문화재 도굴꾼이 장승에 목을 베어 가다 서울 인근에 버리고 간것을 운봉주민들이 가져와 다시 붙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승 목주변에 상처의 흔적이 있다.